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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모 화백 100회 특집 연재 - 15 능가산 부사의방장 - –벼랑 끝 아래에서 창공을 차오르다
  • 기사등록 2021-05-26 11: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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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그리던 변산 부사의방장에 스케치 여행을 다녀왔다. 1,200년 전 신라시대의 고승 진표율사가 12세에 출가하여 부사의방장을 찾아 27세에 3년 동안 수행을 하였던 곳이다.

시간은 많이 흘러 왔지만 그 체취를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고 내변산 진면모를 화폭에 담아보고 싶어 힘들게 다녀왔다.

워낙 험준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산, '생각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의 의미의 방을 3년 전부터 스케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변산의 진면모를 보고

그리려면 부사의방장을 다녀와야만 한다는 고향분들의 말씀을 접한 지 3년만이다.


2018년 11월 3일 토요일 이른 아침에 상서면 청림주차장에 주차하고 고향에서 작은 부동산 사업을 하며 변산을 속살 보듯이 훤히 아는 분과 함께 부사의방장으로 향하여 출발하

였다.

오르는 길이 처음부터 경사가 심하였고 낙엽이 쌓여 미끄러운데다 길을 찾아 잡목을 헤치며 올라야했다. 올라가기를 얼마쯤, 서쇠뿔봉 산등성이 바로 밑에 도착했는데, 여기서부터는 산등성이를 타고 부사의방장이 있는 봉우리까지 이어지는 험한 산행길이었다. 쇠뿔바위봉을 거쳐 고래등바위, 마천대 원효굴, 부사의방장, 의상봉(509m)을 정점으로 흔들바위와 깃대봉, 새재를 지나 청림마을로 하산하며 약 10km를 걷는 스케치 산행이다. 등산로 경사가 만만치 않았지만, 다행히 앞에서 선도하면서 전지가위로 나뭇가지를 쳐주며 자상하게 안내해주었는데도 뒤따르는 나는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가파른 등산길보다 쇠뿔봉 오르기 전 방부목으로 만든 데크 계단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어지러움증까지 나타났지만 정신력으로 서쇠뿔봉까지 올라갔다. 잠시 쇠뿔봉에서 고래등바위를 바라보며 차 한 잔하고 의상봉을 향해 다시 걸음을 재촉하였다. 이곳은 등산로가 아닌 관계로 인적이 끊어있다. 그것이 오히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공존하여 그 시대로 돌아가버린 착각을 일으켰다.


원효굴 근처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남자 두 분 등산객을 만났다. 산에서 사람을 만나니 참으로 반가웠다. 알고보니 나의 친한 친구와 막역한 사이였고 변산을 사랑하는 산악인이었다. 준비해온 빵과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눈 후 다시 출발하는데 갑자기 허벅지 근육이 경련을 일으켜 발을 질질 끌고 가야만 했다. 다행히 일행이 준비해 온 비상약 근육이완재 두 알을 먹였더니 다행히 괜찮아졌지만, 중간중간 가끔씩 오는 통증이 산행길을 방해했지만 오로지 목적이 있기에 여기서 멈추면 안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진행하였다. 산행하며 의상봉 정상으로 가까워질수록 조릿대가 내키보다 높고 빽빽했는데 이런 곳에서 성현이 나온다고 했던가 하는 생각을 하며 산행을 시작한 지 5시간 정도 걸려 원효굴에 도착하였다. 

10평 남짓의 굴인데 남쪽 방향으로 위치해 있었다. 인근 주민이 가져다 놓은 플라스틱 물통에 약수물도 졸졸 떨어지고 수양하며 기도하기에 좋은 굴이었다. 동행해준 분이 준비해온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드디어 부사의방장으로 향했다.

산죽이 있는 비탈진 길을 지나는 오름길에서 많은 에너지를 또 소비해야만 했다. 가끔씩 오는 허벅지 근육통을 이겨내며 부사의방장으로 가다보니 남쪽 방향으로 병풍을 둘러친듯한 암벽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비경이 연이어지는 마천대에 닿았다. 마치 내변산을 바라보며 부사의 방 진표율사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서있는 소나무가 우리를 반겼다. 소나무 우측 절벽 밑으로 나무 밑동에 매어 있는 줄은 총 두 가닥의 줄에 의지한 채 화구배낭을 메고 10m를 내려가야했다. 밧줄을 잡고 암벽의 군데군데 발 디딜 곳을 찾으며 밧줄을 내려 잡으며 내려가니 무성한 조릿대가 먼저 반겼다. 순간 아래를 보니 한 치 앞 밑은 천길 낭떠러지였다. 순간 어지럽고 아찔했다.


마음을 다스리고 사람 정도 다닐 만한 샛길 절벽을 끼고 들어가자 두 평 남짓의 평탄한 공간이 나오고 흡사 얕은 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이 부사의방장이라 하였다.

내변산의 숨은 장소 비밀스런 부사의방장은 바위틈 절벽에다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곳이었고, 쇠말뚝을 박은 흔적과 닫집을 완성하여 기왓장을 얹은 흔적인 와편이 나딩굴고 있었다.

해도 짧고 내려가야 할 시간도 생각해 바로 화구를 꺼내 스케치를 하였다. 비좁은 관계로 화판을 들고 앉으니 무릎 아래는 낭떠러지에 닿았다.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떠올랐다.


어떻게 이곳에서 진표율사는 27세(신라 경덕왕19년, 760년)의 나이에 미륵불상 앞에서 일심으로 계법을 구하는 수행을 능가산 할 생각을 하셨을까 의구심이 생겼다.

김제 만경 출생의 그 유명한 진표율사(眞表律師, 718~?)가 12세 때 금산사에 출가하여 선계산(仙界山=변산) 부사의 암에 은거, 20말의 쌀을 쪄서 말려 하루에 다섯 홉을 당신이 연명하고 다람쥐에게 한 홉을 보시하며 망신참(亡身懺-돌로온몸을 상처냄)으로 3년간 고행이 흘러도 업장이 두꺼워 미륵을 친견하지 못하니 죽을 결심으로 바위 아래로 뛰어 내리니 그 순간 번개처럼 나타난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살며시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에 올려놓고서 더 정진하라고 하며 사라졌다 한다.


이에 큰 용기를 얻어 서원을 세우고 진표율사는 삼칠일(21일) 작정하고 온몸을 돌로 찧으면서 하는 참회 수행법인 망신참법을 수행을 한다. 망신참법으로 3일만에 손과 팔이 부러져 떨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7일째 되던 날 밤 지장보살이 나타나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며 와서 어루만지자 몸이 곧 회복이 되였다 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절망하여 죽음을 선택할 만큼 나약하만, 자신의 몸을 던지면서까지 뜻하는 바를 기어코 이룰 만큼 금강처럼 단단하기도 할 수 있

다. 진표율사는 그 일심으로 더욱 정진하여 21일째 되던 날 천안(天眼)이 열렸다고 한다, 그 천안으로 보자 미륵보살이도솔천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고, 미륵보살은 진표율사에게 “훌륭하다,대장부여! 이렇듯 계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참회하였구나”하고 지장보살은 계를 주셨고, 미륵보살로부터 직접 계를 받은 진표율사는 용왕의 도움을 받아 금산사를 중창했고, 나라를 잃고 실의에 빠진 백제의 유민들과 전쟁으로 심성이 피폐해진 삼국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진표율사께서 떨어져 내렸다는 절벽 위에서 1시간 정도 스케치를 한 후 젖은 낙엽에 몇 번씩 미끄러지듯 내려오며 흔들바위를 지나 소나무정원의 깃대봉에서 잠시 스케치를 하다가

갑자기 아쉬움이 남았다.

삼국시대 3대 고승의 자취가 서린 변산반도의 최고봉의 혈맥을 누르고 있는 부대의 둥근 돔도 헐어버리고, 오갈 수 없게 가로막은 철조망도 철거해서 서해에 빠져드는 붉은 노을의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彼岸)의 세계로 인도하는 날만을 고대하면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새재를 거쳐 청림주차장으로돌아와 무사히 스케치 산행을 마쳤다.


삼국시대 3대(三代) 고승(高僧)의 발자취가 서린 내변산의 가을 풍경 스케치는 금방이라도 신선이 나올 듯 끝없는 선계 같아서 산행은 힘들었지만, 그림 그리고 있는 동안은 내가 신선이 된 듯하였다. 내가 지금부터 작가로 살아가는 동안 삶이 주어진 시간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모르지만, '무엇을 얼마나 남겨두고 가느냐'가 나의 새해 화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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