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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모 화백 100회 특집 연재 - 83 하서 청호리 송호정 - –생거부안의 청호리 마을
  • 기사등록 2021-08-12 17:4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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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리 송호정 1 37x65cm 한지에 수묵담채 2019

부안 하서 청호마을은 부안읍에서 변산해수욕장 방면으로 가다가 하서면 소재지 가기 전 큰다리 갑문(지금은 헐리고 없다)우측으로 논길을 따라 8㎞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해변

과 평야가 겹쳐진 정남향 마을로 이곳에서 남쪽으로 2㎞부터 병풍처럼 서 있는 변산이 뻗어있는 마을이다.옛날에 청호마을은 하서면의 중심마을이었으나 1959년에 면사무소가 섶못(薪池里) 옮겨가면서 변방이 된 마을이다.제주고씨들의 집성 촌으로도 유명하며 옛부터 청호삼절(晴湖三絶)이라하며 마을 사람들이 자랑으로 여겼다. 첫째 청호천의 물소리, 둘째 송

호정에 비치는 반달, 셋째 개바위에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가 그것이다. 또한 청호리는 바다였는데 주변의 뚝을 막아 개간한 들이며 어디든 땅을 파면 물이 난다 하여 갱이샘, 소둠

병, 질마샘이라고 했다.


또한 청호마을 북쪽으로 옛날에는 수백 m만 가면 바다가 손끝에 닿을 만큼 가까웠지만 현재는 계화도 간척사업으로 4㎞ 가량 더 걸어야 바다를 볼 수 있다.

40년 전만 해도 이 마을에는 100세대에 60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했지만, 현재 세대수는 절반이 넘게 줄어든 40여 세대 정도밖에 안된다.


이와 같이 청호마을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회자돼 ‘생거부안’이란 말이 청호마을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조선 영조때 암행어사로 돌아온 박문수(1691~1756)에게 “조선팔도에서 어느 곳이 가장 살기 좋은가”라고 묻자, 박 문수 어사는 곡식과 땔감 고기와 소금이 지천인 부안현 청호마을을 꼽았는데 한 가지만 없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것은 종이만 없고 다 풍족한 마을이라고 전할 만큼 평화로운 곳으로 알려져 있는 마을이다. 조선 성종때의 예문관 성중엄(成重淹,1474~1504)의 호(號)가 청호인데 이곳 출신이다. 그는 시문에 특출했으며, 연산군 1498년 무오사화 때 경연관으로서 명현들의 무고한 화를 변호하다가 인산(麟山)에 유배되었다가 그 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과거 홍문관에 있을 때 왕의 후원관사(後苑觀射: 궁궐 뒷 정원에서 활쏘기를 관람했던 일)를 논계(論啓)하였던 죄로 먼 곳으로 유배된 뒤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였다. 그의 나이 불과 30세의 일이다.


또한 옛부터 청호마을은 부안에서 손꼽을 정도로 인물이 많았던 청호마을에서 고미경(1967~2009) 산악인이 히말리야 11좌를 등정하고 내려오는길에 떨어져 못다 푼 꿈을 접은

채 ‘’히말리야의 여신’’이 된 고인의 고향도 이곳 청호리이다. 작품 속의 송호정은 고맹상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 운치가 너무 아름다워 좌측에 마을을 끼고 어느 봄날에 신작로에 앉

아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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