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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모 화백 100회 특집 연재 - 85 장춘재(장천)의 봄 - –수려한 산세와 맑은 물이 샘솟는 발원지
  • 기사등록 2021-08-14 23: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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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자연이 쉼 쉬는 아름다운 고향 부안 작품 시리즈 작품 42번째는 부안읍내에서 상서면 소재지를 지나 유등사거리 유등재에서 영전(英田)삼거리를 가기 전 작은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유천리 도요지터 30m 앞의 풍경이다. 근경으로 보리밭과 소나무 사이로 농가 한 채가 소담스럽게 보이고 우측 먼 풍경으로 청자박물관과 흙벽돌을 만드는 공장의 굴뚝

이 아스라이 보이는 산간마을이다.,고향의 풍경을 좀 더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선명하고 간명하게, 절제된 필선의 형식으로 생명이 깃든 풍경을 감각의 깊이를 담아 그려 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자연의 이치를 조금이라도 얻고자 오랫동안 이런저런 부안 풍경을 화폭에 담으려고 두루두루 거북이 걸음으로 스케치를 다녀보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뜻과 같이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함을 느끼지만 아름다운 고향을 화폭에 담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오늘도 현장에서 작업을 한다.

아스팔트길 옆에 비록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를 담담한 시선으로 한국인들의 정서에서 밀려나가는 우리의 고향을 그리고 있다. 작품하는 동안 완연한 봄날, 이

웃으로 마실가는 촌부의 설렘,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모처럼 볕이 난 담벼락 옆에 서성대는 아낙네들의 모습들이 아날로 그적인 우리 고향의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와 앉

는다. 조금은 체감으로 느끼기에 쌀쌀한 기온이었지만 그래도 햇빛이 오롯이 나의 몸의 온도를 높여주었다. 열심히 붓 질에 여념이 없다가 해질녘 화판에서 붓을 뗀다. 작업실까지

가는 길 곰소 염전 석양에 눈이 부셨다.


참고로 보안면의 유래를 살펴보면 옛 백제 때의 흔양매현(欣良買縣)의 중심고장이다. 신라에 의하여 백제가 멸망한 후 통일신라 때 경덕왕(景德王) 16년인 757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모든 땅이름도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두 음절 이름으로 바꾸면서 흔양매를 버리고 희안(喜安)이라 하였다. 고려 초에 희안을 버리고 보안(保安)이라 했으며 그 별호를 낭주라 하였는데 조선왕조의 초기인 1416년에(태종16) 부령현과 보안현을 병합시킬 때 부령의 ‘부(扶)’ 자와 보안의 ‘안(安)’ 자를 따서 부안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안 이라는 땅이름 속에는 보안이라는 땅이름이 반절은 녹아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조선조 때 부안현에는 20개의 소단위의 면방을 설치하여 통치하여 보안현 지방에는 건선방(乾先坊). 입상방(立上坊). 입하방(立下坊). 좌산방(左山坊) 등이 있었다. 1914년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통폐합 개편을 하면서 입상방과 입하방을 합하여 보안면이라 한 것이니 옛 고을 이름이 되살아나기는 하였으나 면 단위의 이름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보안면은 부안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어 동으로는 정읍의 고부면과 접하고 남으로는 줄포면과 줄포만에 접하였으며 서편으로는 진서면을 접하고 서북으로는 변산을 등지고 상서면 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면서 10개의 행정리와 4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태어난 백산면과는 달리 밭이 많고 논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며 문화유적지는 다양한 편인데 우동리와 신복리 남포리 등에 지석묘가 산재해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남포리 근처에 안흥창(安興倉)을 두어 전라도의 서남해안지방의 조세를 취합 저장하였었다. 또 유천리와 신복리 감불 등에서는 도자기를 구웠던 가마터들이 많이 보이고 있는데 특히 세계적인 명품 도자기로 꼽히는 고려상감청자(高麗象嵌靑瓷)도 이곳 유천리에서 구웠었다.


또 조선 후기의 큰 작품 속의 아랫마을 장춘리는 약 330여 년 전 조선조 헌종 임금 2년 때 이씨와 김씨가 남쪽으로부터 와서 변산반도의 한 자락 산맥을 끼고 있는 이 마을에 정착하

였다. 산세가 수려하고 온화하며 맑은 물이 멀리서부터 발원하여 이 마을을 돌아 서해에 이르게 되니 이곳을 지나는 길손마다 물길이 길다 하여 장천(長川)이라 불렀다.


또한 이 마을에는 동네 한가운데 큰 샘이 있었고 이 샘은 땅 속 6척 길이에서 솟아나오는 석간수로서 맛이 좋고 물이 많이 나왔다. 이 때문에 태조 이성계가 성계골 감투봉에서 무술훈련과 심신을 수련하고 도를 닦다가 몸이 피곤해지면 이곳에 와서 물을 마시고 몸을 씻으며 쉬어간 곳이라 전해지는데, 끊임없이 솟아나는 긴 샘이라 하여 긴 장(長)자, 샘천(泉)자를 써 장천(長泉)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 후에 이 마을 우물은 널리 소문이 났고 나병환자도 이곳에서 샘물을 먹고 몸을 씻으면 나았다는 말이 전해져 외지에서 물을 마시러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고 등산객들도 이곳을 지나면 꼭 물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산자수명하고 약수가 나는 조용한 마을이라 약 150여 년 전에 광산김씨 한 분이 시주를 받아 조그마한 암자를 건립하고 이름을 망월암이라 지었는데 약수의 효험이 있었는지 신도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 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어찌된 일인지 마을 이름이 따뜻하고 온화하여 언제나 긴 봄같은 마을이라고 하여 장춘(長春)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샘물도 풀에 덮여 있어 형태를 알아 볼 수 없고 천수답 경지정리로 인해 논 가장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한다. 장춘재의 봄 70x43cm 한지에 수묵담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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