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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의 만행과 식민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린 '베델 선생 114주기' 장치순 박사 추모사
  • 기사등록 2023-05-19 21:30:53
  • 기사수정 2023-05-19 23: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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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언론인,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베델(1895년) 



日帝의 만행과 식민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린 베델 선생을 아시나요?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지공원에서 5월 1일 오전 11시 베델 선생 제114주기 경모대회가 열렸다.


114주기인 만큼 국가와 민족, 독립운동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닌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이날 행사는 (사)베델기념사업회 배영기 회장의 개회선언으로 경모행사를 시작했다.


'베델' 독립운동가를 경모한 인사로는 장치순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노인회장, 국가보훈처 남부지청장, 광복회장, 대한매일신보, 마포구청장, 본회 최도열 전회장, 김길자 이화여고.이화여대 전 총동문회장이 경모사를 올렸다.


장도빈 독립운동가의 子 중앙대 명예교수 장치순 박사 

그중 베델 독립운동가와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주필 산운 장도빈 선생의 子 장치순 박사의 경모사는 베델 선생의 정신을 현시대에 상기시키는 감동을 주었다.


장 박사는 "독립운동의 선구자이신 베델 선생님이 서거하신지 114주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오늘은 114년 전 암운 짙은 구한말 베델 선생님께서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한 대한매일신보의 설립을 통한 일본제국주의 침탈을 세계에 고발하고 민족혼을 일깨워 민중의 독립투쟁 정신을 고취했던 대한매일신보의 구국정신과 민족혼의 회복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라며 "일본제국주의와 민족수난기에 민족혼을 잃어버린 한민족은 해방된 조국을 하나의 이념으로 통일하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단되어 동서 이념분쟁의 충돌로 인한 민족상잔의 비극을 맞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어 "베델 선생님과 대한매일신보의 구국정신은 오늘날 우리 민족이 갈 길을 선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며 "대한매일신보의 정신 계승은 110여 년 전 독립투쟁의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 머물러 있지 않은 현재 우리 국가와 민족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정신이다"고 말했다.


특히 장치순 박사의 선친인 장도빈 선생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장도빈 선생은 대한매일신보의 마지막 주필을 하며 끝까지 베델 선생과 함께 언론을 통해 독립운동을 한 부분을 알렸다.


장 박사의 선친인 장도빈 선생은 평생 대한매일신보의 구국정신과 신민회의 독립자강 정신을 실천하는데 모든 노력을 다한 분이시다. 그는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인 민족혼을 찾기 위하여 1916년 단행본 국사를 필두로 50여권의 민족혼을 찾기 위한 민족 역사서를 출간하였으며,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협력하셨으며, 1920년 한성도서 주식회사를 창립하여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도서출간에 의한 민족혼과 민족문화회복사업에 전력을 다하였다."고 말했다.


장도빈 선생은 단국대학교의 교가도 작사했으며, 국군의 정신교육을 위해서 육군사관학교의 교수로 출강하였으며 정규 육사생도 일기생의 국사교육을 담당하였다. 장 선생은 1963년 영면 하실 때까지 단국대학의 국사학과 교수로 고등고시위원, 해방된 조국의 독립운동가 상훈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1962년 건국공로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장치순 박사는 "민족사관의 정신은 베델 선생님이 세운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이며 이러한 민족사관의 진정한 회복으로 오늘날 남북 분단의 고통과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군사강국의 군사적 이념적 종속과 지배하에서 벗어나 핵 전쟁에 의한 민족공멸의 위기를 극복하는 민족의 자주 자유평화통일의 정신적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며 "대한매일신보의 민족혼의 정신부활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새롭게 매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베델 선생님의 114주년 경모의 간곡한 마음을 올린다"며 경모사를 마쳤다.


영국 언론인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베델' 그는 누구인가?


베델 독립운동가는 1872년 11월 3일 영국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베델의 아버지 토마스 핸콕은 188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니콜이라는 사람과 함께 고베시 42번지에 니콜 앤드 컴퍼니라는 소규모 무역상을 차렸다. 베델은 브리스톨의 명문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을 졸업한 후 1888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그의 나이는 17살이었다. 베델 형제 세 명은 새로운 무역상을 설립해서 아버지 토마스 핸콕의 영업을 이어받았다. 베델의 무역상은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영국 물품을 일본으로 들여오고 일본의 골동품 등을 영국에 수출하는 업종이었다. 1899년 베델은 두 동생들과 베델 브라더스를 설립하였다.


베델이 한국에 오던 때의 나이는 32살로, 치밀하고 냉정하며 타산적이라야 하는 무역업보다는 타고난 성격으로 보아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천직이라고 느꼈다.


그는 AP통신과 관련을 맺은 적이 있으며, 1908년 제2차 재판 무렵에는 <데일리 크로니클>의 편집인 도널드가 특파원 자리를 주겠다고 제의한 적도 있었다. 언론인 베델의 능력은 영국과 미국의 일류 신문과 통신사에서도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베델이 한국에 첫발을 디딘 날은 1904년 3월 10일이었다. 러일전쟁이 터진 지 한 달 뒤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통신원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에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 각 나라에서는 많은 기자들이 전황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에 몰려왔다.


베델은 서방 여러 신문의 본사에서 파견된 쟁쟁한 특파원들과 함께 취재경쟁을 벌였다.


그는 짧은 기간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특종 한 건을 터트렸다.


그러나 베델은 곧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을 그만두고 자신이 직접 신문을 발행하였다. 창간에 앞서 1904년 6월 29일에는 견본판 신문을 먼저 만들었고, 정식 창간한 날은 20일 뒤인 7월 18일이었다. 창간 당시에는 하루에 6면 발행으로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4페이지와 한글판 <대한매일신보> 2페이지로 영문판 위주의 2개 국어 신문이었다.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국적인 규모의 반일 민족운동으로 확대되던 무렵인 1904년 7월 18일에 창간되었다. 창간 4일 만인 7월 22일자에는 외부협판 윤치호가 쓴 「황무지 개간 계획」이라는 글을 독자투고란에 게재하여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판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반일 논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날카롭고 강도를 더해갔다. 11월 27일에는 순한문과 영문 호외를 발행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였다. 호외는 한쪽 면에 「한일신조약 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다른 한 면은 영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번역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전말을 실었다.


한국에서는 신문에 대한 신뢰도가 무척 높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대한매일신보>는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통감부는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양위했을 때에 <대한매일신보>가 한국인들을 선동했기 때문에 한국인들과 일본 경찰 사이에 유혈충돌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주장하고 베델의 추방을 더욱 강력히 요구하였다.


통감부가 베델을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영국 측에 요구하자 주한 영국총영사 코번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영국총영사는 베델을 재판에 회부하게 되었다. 치안상태가 불안정한 가운데 일본을 향한 <대한매일신보>의 공격은 수그러지지 않을 뿐 아니라 수위가 점차로 높아지고 있다는 여러 사정을 고려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베델은 영사재판에서 근신형이 언도된 후 6개월 동안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를 다소 신중하게 만들었다. 자칫하면 추방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신기간이 만료되자마자 일본을 공격하면서 통감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대한제국의 내각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베델은 1909년 5월 1일 37살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의학적인 사인은 심장확장이었으나, 그 전 해에 있었던 자신에 대한 재판과 상하이에서의 금고형, 양기탁 재판 때의 국채보상의연금 문제로 조사받은 일 등의 긴장이 겹쳐 건강을 크게 해친 것이 복합적인 원인이었다. 베델의 죽음에 대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애도하였다. 베델은 한국인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경모사 장치순 박사 전문]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시며 독립운동의 선구자이신 베델선 생님이 서거하신지 114주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오늘은 114년 전 암운 짙은 구한말 베델 선생님께서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대한매일신보의 설립을 통한 일본제국주의 침탈을 세계에 고발하고 민족혼을 일깨워 민중의 독립투쟁 정신을 고취했던 대한매일신보의 구국정신과 민족혼의 회복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시점에 와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와 민족수난기에 민족혼을 잃어버린 한민족은 해방된 조국을 하나의 이념으로 통일하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단되어 동서 이념분쟁의 충돌로 인한 민족상잔의 비극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로 지금까지도 동족간 서로를 주적으로 정하고 핵전쟁 위험 속에 민족공멸의 공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델선생님과 대한매일신보의 구국정신은 오늘날 우리 민족이 갈 길을 선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대한제국의 멸망은 조선조의 오랜 기간 친중 사대주의 모화사상에 의한 국혼상실의 결과로 대한매일신보의 역대의 논설위원과 주필이 주창한 조국의 독립은 민족혼의 회복이었다.


민족사학자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산운 장도빈(필자의 선친)이 주장하고 있는 민족사관에 의한 민족혼의 회복 의한 외세의 극복 의한 남북한의 전쟁이 없는 민족 공동운명체의 인식만이 평화적 남북통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신보의 불명의 정신은 민족사의 올바른 인식과 민족혼을 찾아 실천하여 국권의 회복과 민족의 번영 길로 나가는 것이었다. 베델 선생님의 경모의 의의와 대한매일신보의 정신 계승은 110여 년 전 독립투쟁의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 머물러 있지 않은 현재 우리 국가와 민족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정신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선친 산운 장도빈은 한성사법학교 (現서울 사범대학전신)에 재학 중 당시 한성사범한문 교사였던 백암 박은식 선생과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어 졸업 후 1908년 백암 박은색 선생의 소개로 양기탁 선생이 대한매일신보의 기자로 채용하는 한편 논설위원으로 위촉 되어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단재 신채호 선생이 당시 대한매일신보사 주필이셨는데 약 1년 후에 단재 신채호 선생이 병에 걸려 치료될 때까지 일주일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논설을 쓰시고 일주일은 필자의 선친 산운 장도빈 선생이 쓰셨다고 한다. (장도빈, 암운 짙은 구한말, 사상계 4월호, 1962)


당시 필자의 선친 산운 장도빈 선생이 쓰신 대한매일신보 논설문에는 ~ 대한국민의 목적지, 일인 하지, 민족경쟁의 최후 승리~ 등을 논설 제목으로 1910년까지 논설문을 거제 하였고 보성전문야간법과 4회를 졸업하시면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병고로 인하여 대한매일신보의 마지막 주필을 역임하셨다.


이후 신민회 회원으로 가입하시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필자가 베델 선생님의 서거 114주년 경모하는 글로 대한매일신보의 마지막 주필 산운 장도빈의 족적을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하는 바는 대한매일신보의 핵심적 정신이 민족의 해방 전후의 전재과정을 재조명함으로써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적 지주이신 백암 박은식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산운 장도빈의 민족사학의 정신이 오늘날의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여 시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통일이지만 백암 박은식 선생님과 단재신채호 선생님이 해외에서 강력한 독립투쟁을 전재하시다가 서거하시게 되어 불완전한 독립이지만 애석하게도 보지 못하시고 순국하셨고 대한매일신보의 마지막 주필인 산운 장도빈은 해방 후 1963년 작고 잘 때까지 대한민국의 실세이었던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위원인 일제식민사학자들의 광복된 조국에서 실세로 남아 강력한 조직적 저항을 상대로 힘겹고 외로운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민족사관의 복원은 중과 부족이었다.


오늘 한국사학계의 현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산운 장도빈은 1910년 대한매일신보가 폐쇄되자 백암 박은식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이 독립투쟁을 위해서 해외로 망명하신 후 필자의 선친 산운 장도빈 선생도 1912년 연길현 국자가로 망명하신 후 다시 러시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톡)로 망명하여 단재 신채호 선생과 재회하시고 신한촌에 안착 이상설, 이종호, 최재형, 이갑, 홍범도 등 과 교류하였고 권업신문 에 논설을 쓰셨다.


필자의 선친 산운 장도빈은 이후 평생을 대한매일신보의 구국정신과 신민회의 독립자강 정신을 실천하는데 모든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대한매일신보의 국채보상운동을 일환으로 수입 외국산 원료로 가공된 비누와 치약을 사용하지 않고 스님처럼 두발을 정리하고 치약 대신에 소금을 사용하는 습관을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실천하신바 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인 민족혼을 찾기 위하여 1916년 단행본 국사를 필두로 50여권의 민족혼을 찾기 위한 민족역사서를 출간하였으며,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협력하셨으며, 1920년 한성도서 주식회사를 창립하여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도서 출간에 의한 민족혼과 민족문화 회복사업에 전력을 다하였다.


1920년대 잡지 조선지광, 서울, 학생계 등을 발행하였으며,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을 위해서는 일찍이 상동교회 청년학교에서의 국사교사를 시작으로 오성학교의 학감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에게 사제폭탄을 제작 전달한 김홍일 장군, 한국기독교의 거장 한경직 목사, 대한민국 최초의 천문학 박사인 이원철 박사 등 수많은 애국자를 배출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민족혼의 회복을 위한 민족사 복원 투쟁으로는 1936년 동아일보에 66회에 걸쳐 –조선사-를 연재 발표하여 일제 식민사관대항하여 척결하는 민족사회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민중일보를 창간하고 언론활동을 필두로 교육입국을 위한 대한매일신보의 민족혼 부활의 정신인 단군민족정신 구현을 위하여 교명을 국조단군을 의미하는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오늘날의 단국대학교의 교가는 장도빈이 작사한 것이다. 국군의 정신교육을 위해서 육군사관학교의 교수로 출강하였으며 정규 육사생도 일기생의 국사교육을 담당하였다. 1963년 영면하실 때까지 단국대학의 국사학과 교수로 고등고시 위원, 해방된 조국의 독립운동가 상훈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1962년 건국공로 문화훈장을 수여받고, 1990년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 받고 현재 대전 국립묘지 현충원에 안장 영면하고 있으나, 철옹성 같은 조직인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저항으로 베델 선생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인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산운 장도빈의 민족사학 회복은 대한민국의 강단사학에서 아직도 온전히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하에서 대한매일신보와 베델 선생님의 경모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의 경모를 넘어 민족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각오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백암 박은식, 단재 신채호, 산운 장도빈의 민족사관의 핵심은 산운 장도빈이 남긴 국사학사에서 

1. 단군과 단군조선의 실재하였다.

2. 기자조선은 없다. 3. 신라가 통일하지 못했다. 이 시대는 북쪽은 발해 남쪽은 신라로 남북국시대로 시대구분을 명확히 하고 있다.

4. 조선은 명, 청에 조공하였으나 독립국가이다.

5. 우리민족의 국사는 위대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사관의 정신은 베델 선생님이 세운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이며 이러한 민족사관의 진정한 회복으로 오늘날 남북분단의 고통과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군사강국의 군사적 이념적 종속과 지배하에서 벗어나 핵 전쟁에 의한 민족공멸의 위기를 극복하는 민족의 자주 자유평화통일의 정신적 기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한매일신보의 민족혼의 정신부활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새롭게 매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베델 선생님의 114주년 경모의 간곡한 마음을 올립니다.


2023년 5월 1일

중앙대학교 경영경제대학 명예교수 9현)

전) 중앙대학교 사회과학대 학장

고 산운 장도빈의 자

경영학박사 장치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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