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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모 화백 100회 특집 연재 - 40 월명암의 겨울 - –내변산의 봉우리를 품은 월명암
  • 기사등록 2021-06-24 11:08:07
  • 기사수정 2021-06-24 23: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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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암의 겨울 120*50cm 한지에 수묵담채 2019

월명암에 오르기 위해 스케치 일행은 남여치에서 차를 세워두고 간단한 준비 운동을 한 후 쌍선봉 쪽을 바라보며 고향의 지인들과 오랜만에 잔설을 감상하며 가파른 산길을 올라

갔다. 남여치(藍輿峙)는 조선시대 이완용이 전라북도 관찰사로 있을 때 남여(藍輿)를 타고 낙조대에 올라 서해 낙조를 보고 쌍선봉에 올랐다 해서 그리 전하여 유래를 알고 보면 조

금 찝찝해지지만, 여기서 ‘남여(藍輿)’는 벼슬아치들이 타던 지붕 없는 가마를 말한다. 입산했으면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제 발로 걷는 게 도리이거늘 너른 임산도로도 아닌 좁고 가

파른 산길을 억지스레 가마로 올랐다니, 산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훗날의 행실을 가늠할 수 있다.


각설하고 기분좋게 올랐다. 일행 중에 건강을 찾으려고 등산학교에 입학하여 백두대간을 완주하여 1편을 쓰고 2편을쓰고 있는 “백두대간을 그리다”의 김태연 작가가 우리 일행

을 안내하니 든든하다. 미리 월명암에 따뜻한 점심공양까지 말씀드리고 올라가는 길이라 더욱 발걸음이 가볍다.

오래 전에는 이 길이 울창한 오름길이지만 수령이 오래된 나무는 없고 지금은 그래도 나무가 울창했지만 70년대 내가 올라갔을 때만 해도 거의 민둥산으로 기억된다. 한때는 변산

반도의 소나무 등 나무로 유명했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 때 이규보는 “변산은 우리나라 재목창(材木倉)으로 궁궐을 수리할 때 항상 재목을 베어내지만 아름드리 나무가 떨어

지지 않는다”고 적혀있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큰 소나무가 치솟아 해를 가렸고 산중에는 좋은 경작지가 많으며 땔나무와 조개는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될 만큼 풍족하다”

고 적혀 있다. 이렇듯 풍부했던 변산의 나무는 해방 전후로 피폐해졌다. 일제강점기 말 대동아전쟁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많은 수목이 벌채되었으며 해방 후 무허가 도벌이 극심해 월

명암 주변의 20~30m나 되는 아름드리 낙락장송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나의 집에서 변산까지 꽤나 먼 거리지만 변산까지 가서 나무를 해왔다고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으니 변산의 나무가 남아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변산에는 유명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변재(邊材), 변청(邊淸), 변란(邊蘭) 삼변(三邊)을 꼽았다. 변재(邊材)는 변산의 소나무를 이르는 것이며, 변청(邊淸)은 변산 곳곳

의 바위벼랑 벌집에서 따는 꿀을 이르는 것으로 질이 좋기로 유명해 왕실에도 진상되었다고 한다. 변란(邊蘭)은 변산에 생하는 난으로 보춘화(報春花)를 이르는 말이다. 보춘화는

일찌감치 꽃을 피워 봄을 알리는 난이다. 그래서 ‘춘란(春蘭)’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변재가 거덜나면서 변청도 사라졌고 변란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어릴 적 소 키우는 것보다

난 캐서 버는 돈이 많다 하여 무분별하게 트럭으로 가져갈 정도로 캐가면서 보기 어렵게 되었다.


월명암으로 가는 산길은 음지여서 잔설이 계속되는 오르막이 이어졌다. 중간에 예쁜 일행 중에 한 명이 힘들겠다고 애정어린 투정 때문에 조금 느린 걸음으로 산행을 계속했다. 계속해서 미세먼지와 해무 때문에 월명 앞 내변산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기분은 썩 좋지 않을 즈음 산행 시작 후 처음으로 짧게 햇빛이 내리쬐는데 햇살의 힘이 강력하게

느껴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월명암에 가까워지니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돌계단 위 대웅전 마당에서 어미 삽살개와아기기 삽살개가 꼬리를 흔든다. 어미 삽살개는 애교를 부리는 어린 삽살개는 공양값을

한다고 마구 짖어댄다. 참 어이없다. 일행이 삽살개와 기념사진을 찍고 준비해온 초코파이도 주고 친근한 척 해보며 베낭을 요사체 토방에 내 항상 준비해 놓는 따뜻한 약차 한 잔을 하니 피로가 물러가는 듯했다. 공양 시간이 많이 남아 낙조대를 올라가기로 하고 눈 덮인 월명암 뒤편 능선을 따라 20여분 올라가니, 화려하진 않지만 시원한 시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 옛날 초등학교 졸업수학여행 때 스님께서 우리들한테 낙조대에 올라가서 보면 산동반도가 보이는데,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산동반도에서 ‘새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라는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한참 성장할 때 까지 믿고 있었으니 믿을 사람 없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서해바다를 향해 붉디붉은 그리움을 토해내는 해는 바라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다시 낙조대에서 내려와 맛있는 점심 공양을 한 뒤 절 앞 텃밭에 앉아 스케치를 하였다

월명암은 정면 3칸, 측면 2칸 기단이 반듯하게 보이고 단정한 느낌의 대웅전은 용이 4마리나 보이고 지붕 처마 끝에 ‘이문’이라는 용이 웅크리며 있는데, 용왕의 둘째 아들로 멀리보

기를 좋아하는 용으로 불을 억누르는 힘이 있어서 화재를 예방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며, 중생을 극락의 세계로 인도하는 용머리가 반야용선임을 알려주고 있고 익공 사이 연봉오리가

참 예쁘게 조각되어 있어 고고한 맛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월명암 대웅전의 창문은 부처와 통하는 문으로서 화려한 꽃살 꽃무늬 창살은 아니지만 단아하고 격이 있는 격자무늬 창살도 품격 있는 단아함을 보여준다. 범종각은 텃밭에서

스케치하며 바라보니 기둥이 거대한 지붕을 받치고 있는 게 아니라 지붕이 허공에 떠있는 느낌마저 주며 멋있게 전나무와 속삭이듯이 서 있었다. 마치 지붕이 한번 펄럭이면 봉황새와 같은 종루가 내변산 쌍선봉부터 관음봉까지 훨훨 날아갈 듯 기세가 등등하니 성현이 나올 절간 같다. 범종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도구로서 이 범종이 울리면 내변산의 산세를 타고 온갖 번뇌가 적멸할 듯하다고 한다. 타종은 새벽 4시와 오후 7시 정도 타종을 한다는데 ‘범종 앞 기왓장에 치지마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대웅전 왼쪽의 열정각이 있는데 뜨거운우물인지 뜨거움을 식혀주는 우물인지를 생각해봤다.


내려가는 길 해우소 앞에 200년은 족히 되는 사철나무(서산 간월암 250년 된 사철나무)도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변산의 봉우리를 월명암이 다 품고 있는 듯한 주말 오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월명암 공양간 마루에 마련된 따뜻한 차를 마시고 하산하는 내 마음까지 따뜻함을 느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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